무중력 책장 : 살인자의 기억법 이북, 김영하 원작 반전 소설
뒤늦게 알쓸신잡 김영하 작가님의 매력에 빠져, 살인자의 기억법을 빌리러 갔습니다. 화도도서관은 사람이 적으니 책이 있을거라고 생각했는데, 왠걸, 예약대기만 29명이었습니다. 집에 와 검색해 보니 남양주 대부분 도서관에 책이 없었고, 되레 당연히 없을 거라 생각했던 학교 도서관에는 막 반납된 책이 한 권 있었습니다. 학교에서 빌려올걸....
후회하고 있던 차에 목록 중 '살인자의 기억법 이북'이 보였습니다. 학교 도서관에서 e-book으로 살인자의 기억법을 빌릴 수 있는데, 예스24와 교보에 비해 이용자가 적은 영풍문고 이북이 남아있었습니다. 영풍문고 뷰어를 설치해야 한다는 귀찮음 정도는 감수할 수 있었습니다. 도서관에서 헛탕치고 왔는데 이북을 빌리다니, 정말 운이 좋았다고 생각하며 책을 다운받았습니다.
잠들기 전에 보면 좀 서늘하거나 꿈자리가 뒤숭숭할까봐 걱정은 되었으나, 호기심이 걱정을 가뿐히 눌렀습니다.
첫장부터 강렬합니다. 또한 묘하게 웃겼습니다. 일부러 웃기려고 개그 치는 것보다 그냥 혼잣말 하는데 관점이 독특한 것을 보면서 빵 터지곤 하는데, 이 책의 주인공이 그렇게 웃긴 스타일이었습니다. 독백 대사들이 왜 이리 재미난지.
재미있기도 하고, 문단이 가볍게 구성되어 있어서 술술 읽혔습니다.
생각보다 분량이 짧습니다. 기본 2~300 페이지 넘어가는 실용서들을 읽다가, 약 100쪽 짜리 책을 읽으니 부담이 없었습니다.
"읽기 시작하면 어떻게 될 지 예측이 안 되서 책을 내려놓을 수가 없을거에요."라는 원장님의 추천사처럼, <살인자의
기억법>은 범죄 추리 소설을 꽤 읽었어도 예측이 어려웠습니다. 어디선가 읽은 듯한 뻔한 구석이 없고, '대체 어떻게 되는거지?'라는 궁금증이
한가득이었습니다. 어느 순간 반을 읽었습니다. 마저 읽고 자고 싶은 유혹을 간신히 눌러 참고 잤는데, 잠자리에 들면서도 내일 아침부터 살인자의 기억법을 이어서 읽고 싶은 생각 뿐이었습니다. 다음 날, 마침 컴퓨터가 업그레이드 하는데 2~30분 정도 걸리길래 살인자의 기억법 이북을 다시 집어 들었습니다. 대체 어떻게 되려는지 궁금해서 견딜 수 없었어요.
살인자의 기억법 간단한 줄거리 (스포 없음)
반전소설을 스포를 발설하는 것은 소설에 대한 예의가 아닌 듯 합니다. 이미 영화로도 제작되었으니 영화 시놉시스 정도로 간략히 원작 소설 살인자의 기억법 줄거리를 소개하자면, 엄청나게 많은 사람을 죽인 살인자가 주인공 입니다. 서른 명, 마흔 명, 혹은 그보다 더 많은 사람을 죽인 연쇄살인마인데, 치매가 와서 기억을 잃어가기 시작합니다. 그 때 살인자가 사는 동네에 또 다시 연쇄살인이 일어나고, 살인자는 자신과 같은 과로 보이는 남자와 마주치게 됩니다. 문제는 치매로 인해 기억을 잃어가기 때문에, 그와 마주치고도 잊었고, 같은 과인 그 남자로부터 딸인 은희를 지키기 위해 필사적으로 기억을 붙잡습니다.
책을 읽고 남은 생각거리
조여드는 재미를 느끼며 술술 읽었으나, 읽다보니 치매 환자의 고통, 성격장애자의 사고 구조, 저 마다 다른 삶의 목적에 대해 생각해보게 되었습니다.
저는 할머니들이 말년에 치매로 고생하시다 돌아가시는 것을 보며, 치매가 가족에게 끔찍한 병이라 생각했습니다.
당사자는 어차피 기억을 잃어가니까 아무 것도 모르신다고 생각했는데, 이 책 덕분에 치매 환자의 괴로움에 대해 조금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별 생각없이 쓰는 단어에 대해 좀 더 구분지어 생각해 보게 되기도 했습니다. 특히 수치심과 죄책감에 대해서요.
사람마다 화 내는 포인트가 다른데, 자기 자신에게 화가 나는 사람, 타인 탓을 하며 화를 내는 사람 그 기저의 감정은 참 다르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보통의 사람과는 사뭇 다른 삶의 목적을 가지고 살아가는 살인자의 이야기를 들으며, 제게 가슴뛰고 살아 있다는 것을 느끼게 해주는 일은 무엇인지도 떠올려 보게 되었고요.
"생각해 봅시다. 1. 2. 3" 이런 식으로 생각해 보라고 한 것도 아닌데, 즐겁게 소설책을 읽는 가운데 생각해 보게 되는 것이 많아지는 책이었습니다.
평론가의 살인자의 기억법 해설
꼬리를 무는 생각을 한 켠에 밀쳐두고, 살인자의 기억법 결말을 향해 달려가다가 끝 장에 이르러 당황스러웠습니다.
어라? 끝인가?
!!!!!!!
이런 순간, 뒷장에 권희철 평론가의 긴 해설이 있습니다. 죄송한 이야기이나, 재밌고 산뜻한 책 뒷장에 현학적인 평론이 이어지자 지루했습니다.
가뿐하던 본문에 비해 글씨가 너무 많고, 제목부터 사드-붓다의 악몽이라 난감했습니다. 단어를 찾아보는 노력을 했으나 사드 검색하면 죄다 사드 미사일만 나와서 끝까지 사드-붓다가 무슨 뜻으로 쓴 말인지 모르겠습니다. 본문 중에 "은희는 교양이 없다" 처럼 저도 교양이 없어서 그런가봐요.
굳이 책을 구절구절 분해해서 다시 설명을 해주고, 수차례 남성적 문체라는 것을 강조할 필요가 있는지 의문이 생겼습니다.
열린 결말로 책 잘 읽었는데, 평론가가 나서서 답은 이거라고 하며 다르게 해석하지 못하게 하는 듯해서 언짢았습니다.
그래서 휙휙 대충 넘겼습니다. 요즘 저의 책 읽기 방법은 맘에 안 들면 안 읽는 것 입니다. 예전에는 탐탁치 않거나 이해 안되는 글도 참을성을 가지고 읽었는데, 그럴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의 유한한 인생에 세상의 좋은 책을 다 읽지 못하고 죽을텐데, 엄한 책에 시간 낭비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현학적이고 지루한 평론가의 글에서 한 가지 큰 소득은 반야심경에 대한 해석이었습니다.
수 년 전 어느 날 우연히 택시에서 '공하고 공하다' 라는 불경을 들었던 것이 마음에 크게 남았으나, 아직까지 속 시원한 해석을 얻지 못했던 상태였습니다. 뜻밖의 살인자의 기억법에서 제가 들은 불경이 반야심경이며, 뜻도 모르면서 가슴에 꽂혔던 '공하다'는 말의 뜻이 무엇인지 평론가의 해설 부분에서 알게 되리라고는 기대도 하지 않았습니다.
이 부분 만큼은 곱씹어 읽었습니다.
그러나 담백한 소설 뒤에 묵직하고 화려한 평론이 이어지니, 담백하게 초밥 먹고 버터크림과 설탕 덩어리로 화려하게 장식된 맛없는 컵케잌을 한 입 먹어 입맛 버린 느낌이었습니다.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김영하 작가의 말
평론으로 인해 언짢은 기분으로 마무리 되려던 순간, 뒷장이 있었습니다.
"작가의 말. 이 소설은 내 소설이다."
제목부터 피식 웃음이 납니다. 네, 살인자의 기억법은 김영하 작가님 소설이죠. 무슨 이야기인지 읽어보니, 본문 못지않게 담백하고 덤덤하나 유쾌한 후기가 있었습니다. 소설은 작가가 창조주처럼 다 지어내는 듯 하지만, 알고 보면 주인공이 정해지면 주인공을 따라야 하고, 설정이 정해지면 첫번째 설정을 따라야 하기 때문에 제약이 많다는 말에, 새삼 소설과 소설가가 그렇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즉 소설가가 마음대로 다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주인공이 하는 이야기를 전달하는 듯 했습니다. '이야기가 내게로 왔다'라는 느낌이기도 하고, 흡사 무속인이 신이 내 입을 빌어 이야기한다는 것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어찌보면 글이란 시작은 제가 하지만 글 자체도 생명을 가지고 뻗어나간다는 느낌이 들어, 글쓰기에 대한 부담이 조금 줄어들었습니다.
덤덤하게 적은 듯 했으나, 가벼우면서도 따스한 마무리였습니다. 버터크림 설탕 컵케이크에 버린 입맛을 헹궈주는 라임 탄산수 같았습니다.
살인자의 기억법 - 김영하 지음/문학동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