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중력 영화 : 원작 소설 모욕한 영화 살인자의 기억법 결말
소설 <살인자의 기억법>을 너무 재미나게 읽어, 영화 살인자의 기억법을 봤습니다. 한국 영화 전체를 싸잡아 욕하고 싶을 정도로 끔찍한 영화였습니다. 설경구는 여전히 정의로운 강철중이고, 설현은 치매 환자와 한 번도 있어본 적 없는 듯한 착한 척 쩌는 딸이고, 김남일은 시골 동네 경찰이 패션모델처럼 나옵니다. 캐릭터 설정에서 현실성이 떨어지는데다 시나리오도 개떡같습니다.
영화보고 이렇게 화가 나기는 오랜만 입니다. 소설 살인자의 기억법은 보기 드문 재미난 범죄 소설이었는데, 영화 살인자의 기억법은 김영하 작가님께 석고대죄 해야 될 것 같은 끔찍한 영화였습니다.
같이 본 친구는 눈을 정화하고 싶다며 메멘토, 유주얼 서스펙트, 식스 센스 다시 보고 싶다고 했고, 저는 원작 소설은 안 이랬다며 뒤늦게 원작 소설에 대한 이야기를 줄줄 이야기하게 되었습니다. 할 수 있다면 영화 살인자의 기억법 이전으로 돌아가고 싶을 정도 입니다. 원작 소설의 감동까지만 기억하고 싶어요.
영화 살인자의 기억법이 얼마나 거지같았는지 비판하기 위해 원작 소설 살인자의 기억법에 대한 스포를 할 예정입니다.
소설 살인자의 기억법은 훌륭한 소설이니 스포 당하기 싫으시면 빨리 이전 페이지로 돌아가주세요.
영화 살인자의 기억법 vs 원작 소설 살인자의 기억법 비교
살인자의 기억법 원작 소설은 상당히 사실적입니다. 첫 장 첫 문단부터 흡입력이 있어요. 그러나 영화는 시작부터 식상합니다. 터널 앞에 선 설경구라....
영화 박하사탕을 안 본 저도 설경구가 터널 앞에서 나 다시 돌아갈래 라고 하는 장면 사진은 수 십 번 보았습니다. 감독 인터뷰를 보니 터널이란 것이 죗값을 치루고 나간 길을 상징했다고 하는데, 그건 감독님 생각이고 영화를 본 저는 뜬금없이 저 터널은 뭔가 싶을 뿐이었습니다. 일반적으로는 사람들이 터널로 걸어다니지 않아요. 그리고 영화 줄거리와도 별 상관도 없고요. 지극히 식상한 터널 신으로 시작한 영화는 더욱 더 상투적인 표현으로 이어집니다.
설경구가 기억을 잃을 때면 눈에 경련이 와요. 이 장면도 어처구니가 없는 것이, 경련이 올 수는 있는데 파르르 떨리는 미세 경련이지 온 얼굴을 꿈쩍이는 경련이 오면서 기억을 잃지 않습니다. 치매 환자를 안 만나 보셨나 싶은 의문이 들었어요. 치매 환자가 기억을 잃을 때마다 얼굴에 경련이 온다면, 차라리 가족들은 견딜 수 있을 겁니다. 아, 지금부터 기억을 잃으시겠구나 짐작할 수 있잖아요.
제가 세상 모든 치매 환자를 만난 것은 아니나, 제 주변에 치매 환자들은 아무 티도 안 났습니다.
너무나 멀쩡한 웃는 얼굴로 "아이고, 아가. 왔니? 대학교는 잘 다니고?" 라고 물으시고, 10분 뒤에 "아이고, 아가 어떻게 여기까지 왔니? 대학교는 잘 다니고?" 라고 물으시고 또 몇 분 뒤 저를 처음 보는 듯 "아이고 아가 왔니? 학교는 잘 다니고?" 라고 하셔서 사람을 환장하게 만드는 겁니다. 티가 안 나요. 너무 멀쩡해 보이는데, 하는 말이 이상하니까, 내가 알던 그 사람이 맞고, 익숙한 말투에 애정도 듬뿍 담겨 있는데, 내용이 이상하게 뒤틀려 있습니다. 귀신이라도 쓰인 것처럼 생경한 느낌이 듭니다.
게다가 이야기의 내용이 점점 이상해 집니다. 30대 중반이던 손녀에게 대학교 이야기를 한다는 것부터 기억이 십 수년 전으로 퇴행한 것인데, 이어서 시집가서 애가 둘인 동생을 떠올리시면서 "ㅇㅇ이는 고등학교 졸업 했나?" 이러십니다.
기억이 퇴행하면서 점점 앞당겨 지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어떨 때는 멀쩡하게 현재를 기억하고, 작년 생일 때를 기억하시기도 하고요. 그러다 또 어느 순간이 되면 옆에서 간병하는 딸도 못 알아보며 "아줌마는 누구요? 얼른 집에 가서 서방 밥 해줘야지 여기서 뭐하시오?" 이러기도 합니다. 치매하는 것, 기억이 사라지고 뒤섞인다는 것은 한 마디로 아주 지랄같은 병 입니다.
단순히 밥 먹었는데 또 밥먹거나 벽에 똥칠을 해서 힘든게 아니라, 기억이라는 것은 혼자 가진 것이 아니라 '함께' 추억하는데 상대방이 자꾸 기억을 뒤트니까 그 추억을 함께 하는 사람도 괴로워집니다. 그래서 기억을 공유하는 가족이 정말로 견디기가 어렵습니다. 슬프기도 하고, 정말로 힘들기도 하고요.
여기에서 또 하나의 허구가 등장합니다. 치매인 아버지, 가끔 기억을 잃고 목을 조르는 짓까지 하는 아버지를 천사같은 설현은 포기하지 않고 마냥 지극정성 돌본다는 것 입니다.
설현이 착하게 등장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아빠가 자꾸 헛소리 팩팩해대면 딸이 변해야죠. 치매환자와 둘이 산다는 것은 보통의 20대 여자가 버틸 수 있는 상황이 아니거든요. 게다가 아버지는 연쇄살인범 입니다. 어딘가 상당히 이상한 사람이라 딸과 정상적인 인간관계가 있을 수 없습니다. 이상한 성격의 아버지 혼자 키운 딸이 아버지를 이토록 사랑한다니, 이상합니다.
원작 소설에서의 딸래미는 너무나 힘들어 합니다. 그래서 아부지 몰래 방문 닫고 친구와 통화하며 너무 힘들다고 하소연을 하고, 아부지는 방문 밖에서 딸의 대화를 몰래 엿듣곤 합니다. 아버지의 치매가 심해질수록 딸은 견디질 못하고, 몰래 요양원도 알아봅니다. 그러나 차마 아버지에게 요양원 가라고 할 수가 없으니 힘들어 할 뿐인데, 아버지는 딸의 방을 뒤져서 요양원 팜플렛을 보지요. 박주태와 결혼하고 싶어하는 것도 그렇게 아버지로부터 탈출하고 싶은 마음이 들어 있습니다. 스물 다섯 밖에 안 됐는데 평생 치매 아버지 병수발만 할 것을 생각하면 끔찍한 것이 당연합니다.
소설 쪽이 훨씬 개연성이 있습니다. 치매환자가 자기 발로 '너한테 폐끼치기 싫어서 요양원 갈래' 라는 소리를 할 리 없습니다. 그 정도로 상대를 배려할 수 있고, 생각을 잘 할 수 있으면 치매환자가 아니죠. 치매 환자는 밥 먹은 것도 까먹을만큼 자꾸 기억이 사그러들어 자기 자신을 챙기기에도 벅찹니다. 흔한 표현 중에 '자기 자신과의 싸움'이라는 말이 있는데, 정말로 치매환자는 자기 기억과의 싸움인 듯 합니다. 그리고 스스로도 속상해하고 화가 나서 어쩔 줄 몰라합니다. 우리도 깜빡 하거나, 정말 까맣게 잊어 버린 것이 잊으면 황당하기도 하고 억울하기도 하고 화도 나잖아요. 그 감정을 치매 환자는 매일 느끼는 겁니다.
그런데 설경구 아저씨는 딸을 위해 요양원에 가겠다고 하고, 설현은 절대 아빠 요양원에 안 보내겠다며 신파극을 찍으십니다.
아, 정말로 저 둘 다 치매 환자와 살아본 적도 없는 것 같고, 영화 찍기 위해 최소한의 치매 환자 관찰도 안 해 봤나 봅니다. 이 영화의 핵심은 살인자가 치매라는 것인데, 그 부분을 너무 신파를 찍으며 개연성 없이 표현해서 긴장감이 뚝 떨어집니다.
다음으로 정말 실망스럽던 부분인 박주태 (영화에서는 민태주) 입니다. 연이어 벌어지는 연쇄살인의 범인으로 의심되는 인물이자, 설경구가 마주치자마자 저 놈이 살인자라고 알아보는 인물이기도 합니다. 이 쪽도 동족을 알아보고 주인공 주변을 맴돌다가 딸과 결혼하겠다며 찾아옵니다.
원작 소설에서 주인공이 처음 박주태와 접촉사고가 났을 때 사냥용 지프 트럭에서 피가 흘러나오는 것을 알아 챕니다. 이 후 박주태가 자신의 주변을 어슬렁거린다고 생각하고, 사냥용 지프 트럭을 자꾸 발견합니다. 그러나 이 모두는 주인공의 착각이었습니다. 원작 소설 살인자의 기억법 결말에서 부동산 투자자이자 사냥용 지프트럭을 몰고 다니는 날건달 이미지 였던 박주태라는 자는 알고 보니 소나타를 타는 경찰이었습니다. 연쇄 살인범을 잡기 위해 주인공을 의심해서 주변을 맴돌고 집에 찾아오기도 했었는데, 그것을 주인공은 딸과 결혼 허락을 받으러 왔다고 착각을 한 것 입니다. 즉, 박주태가 경찰이었다는 것이 소설 결말에서는 대 반전 중 하나였습니다.
그러나 영화에서는 처음부터 소나타를 타는 경찰로 나옵니다. 경찰인데 그냥 사이코패스로 나오죠. 반전이 있을 줄 알고 끝까지 봤는데, 그냥 끝까지 어머니에게 다리미로 맞으며 삐뚫어진 사이코패스일 뿐 반전은 없습니다. 영화 마지막에 "민태주의 죽었다는 기억을 믿지 마라"였나, 아무튼 민태주가 안 죽었을 수도 있다면서 반전을 꾀한 것 같은데, 전혀 반전으로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그 훌륭한 반전 소설을 어떻게 이토록 뻔하디 뻔한 반전없는 영화로 만들어 놓은거죠? 반전 돌려줘요!
대반전이었던 원작 소설 살인자의 기억법 결말
원작 소설 결말의 충격적인 반전 하나는 딸 '은희' 자체가 허구였다는 것 입니다. 다른 반전 소설이나 반전 영화에서도 알고 보니 모든 범죄를 내가 저지른 것이었다거나, 싸우던 적이 알고 보니 자신의 또 다른 자아였다거나 하는 경우는 여럿 있었습니다. 그러나 치매가 극에 달했을 때 은희는 며칠 째 집에 들어오지 않고, 전화도 받지 않자, 주인공 김병수는 박주태가 딸을 죽인 것이라 생각해 대 결전을 준비합니다.
그러나 이미 치매가 심해져 기억이 더 빠른 속도로 사라지죠. 이러다 주인공도 박주태의 손에 죽는 것은 아닌지 긴장감을 느끼게 됩니다. 다시 주인공의 정신이 돌아올 무렵, 우리 집 개인지 아닌지 모를 개 한 마리가 여자 손을 물고 돌아 다닙니다. 냉장고에도 손목이 하나 들어 있고요.
그 순간 연쇄 살인자인 주인공이 먼저 한 것은 '내가 또 누군가를 죽였나보다' 라면서 재빨리 목욕을 하고, 입고 있던 옷을 벗어서 태웁니다. 연쇄 살인자 다운 발상이라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치매로 자꾸 깜빡 하니까, 자신이 또 누굴 죽였을지도 몰라서 재빨리 증거 인멸부터 하고 보는 겁니다. 그리고 기억이 가물가물하자 혹시라도 자신이 딸을 죽인 것은 아닌지 괴로워 합니다. 대 혼란이죠.
그리고 경찰이 찾아와 김은희 살인범으로 추궁을 합니다. 딸이 죽었단 소리를 듣자, 김병수는 놀라서 오줌을 지립니다. 자신의 딸을 자신이 죽였다는 것에서 오는 충격 같은 것이었지, 영화처럼 이유없이 오줌을 지리지 않아요.
이 때의 반전은 김은희가 딸이 아니었다는 것 입니다.
"김은희씨 왜 죽였습니까? 요양보호사인 김은희씨 왜 죽였냐고요?" 라고 하는데, 지금껏 주인공 중 하나였던 딸 김은희는 방문 요양 보호사였지 딸이 아니었던 겁니다. 정말 반전이었어요. 나중에 짜맞춰 보니, 마지막으로 죽인 여자의 딸 이름이 은희였는데, 그 어린 애도 그 자리에서 같이 죽였을 뿐, 거두어서 데리고 살지 않았던 겁니다.
소설 결말을 보면 죄지은 자의 기억의 재구성에 대해 여러 가지 생각이 듭니다.
경찰에 연행되어 김은희 살인에 대해서는 기억을 못하지만, 이전의 살인에 대해 술술 불며 드디어 살인자는 구원을 받는 것처럼 느낍니다. 연쇄살인을 저지르고도 잡히지 않았던 것에 대해 늘 불안하고 언젠가 감옥에 갈지도 모른다며 불안에 떨다가 드디어 잡혀서 갇히자 되레 안도를 느끼는 것 입니다. 오히려 잡혀서 안도감을 느끼는 것도 반전 중 하나라 할 수도 있습니다.
딸인 줄 알았던 여자가 딸이 아니었다. 아니, 애초에 딸이란 없었다.
박주태라는 연쇄 살인마를 죽이는 것을 마지막 과업이라 생각했는데, 박주태는 형사였다.
살인자는 자신의 살인이 공개할 수 없는 예술이라 생각했기에, 경찰에 잡혀 술술 진술하는 과정에서 오히려 행복해했다.
이런 충격적인 반전이었기에 짧은 소설 뒤에 긴 여운을 남겼는데, 영화 살인자의 기억법 결말은 위의 모든 반전이 사라지고, 정의로운 연쇄살인마 김병수가 사이코 민태주로부터 딸 김은희를 지키고 끝이 났습니다.
원작 소설을 읽고, 한껏 기대하며 봤던 제게는 반전 소설을 바탕으로 한 영화에 반전이 없다는 것이 반전이었습니다. 정말 아무 반전없이 끝난 것이 믿기지 않아 뒤에 숨은 영상 더 있나 샅샅이 뒤져봤지만 반전없이 끝난 것이었습니다.
그 재미난 반전 소설을 이렇게 개떡같이 식상한 영화로 만들 수 있다는 것이 충격적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