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중력 책장 : 정리 방법에 관한 책 3 : 거의 모든 것의 정리법, 우리집엔 아무것도 없어2, 정리의 기술 69
미니멀리즘에 푹 빠지기 전에는 정리 방법에 관한 책들을 자주 읽었습니다. 마음 심란할 때, 사실은 집이나 물건보다 제 머릿속이 잘 정리가 되지 않아 문제인데, 주변이라도 홀가분하게 치우고 싶어 정리 방법 책들을 집어들곤 했습니다.
정리의 기술 69
제가 산 책이기는 하나, 나중에 보니 이 책을 왜 샀을까 의아했습니다. 아마도 나를 변화시키고 업무효율을 높이는 정리 방법이라는 대목에서 혹했던 것 같습니다.
마음이 심란한 때에 한 번 가볍게 읽기는 좋습니다. 이 책은 집 정리가 아니라 일과 및 일상 정리 전반에 대한 짧은 에피소드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택시를 타는 것의 가치라거나, 스크랩 하는 법 등을 배우기에는 좋습니다. 그러나 이 책을 읽고 정말로 무언가가 산뜻하게 정리가 되지는 않습니다.
우리집엔 아무것도 없어 2
저에게 아주 큰 인상을 남긴 책 <우리집엔 아무것도 없어> 두번째 책도 빌려다 읽었습니다. 첫번째 책이 책으로서는 좀 실망스러워서, 우리집에 아무것도 없어 2는 구입하지 않고 도서관에서 빌려다 읽었습니다. 우리집에 아무것도 없어 2에서는 구체적인 방법을 알려준다고 하였으나.... 역시나(?) 구체적인 방법은 없습니다. 주위에서 자꾸 물어보니까 노하우를 정리하고자 한 시도는 엿보이나, 독자 입장에서는 '시도'만으로는 충분치 않았습니다. 전 정말로 구체적인 '방법'을 원했지, 작가가 '한 번 생각을 정리해 볼까?' 하는 과정을 어설픈 만화로 그린 것을 원치 않았어요.
두번째 책을 안 사길 잘했다 생각했습니다. 만화책이고, 두번째 책은 별 내용이 없어서 30분 정도면 다 읽는데, 읽다가 중간에 졸 수 있습니다.
거의 모든 것의 정리법
우연히 전자도서관에서 빌려서 읽었는데, 여러 모로 놀라운 책이었습니다.
먼저, 주인공은 강박증 (우리가 농담처럼 이야기하는 강박증같은 취향 말고 진짜 강박증)이 있는 환자였는데, 그것을 자신의 재능으로 승화시켰습니다. 강박증이 있어 사물들이 널부러져 있는 것을 보기 힘들었던 저자는 그것을 규칙성있게 정리하고자 합니다. 그러나 저자의 취향대로 집을 치워버리자 가족들은 화를 냈고, 정리를 할 때 실제 사용자들의 동의가 필요하고, 사람들(가족, 또는 룸메)가 편리하다고 느껴야 자신의 뜻대로 완벽하게 정리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그는 배우에서 '정리의 제왕'이 됩니다. <우리집엔 아무것도 없어>의 유루리 마이처럼 다 갖다 버리는 것이 아니라, 게임팩, 사진, 장난감 등등을 모두 가지고 있되, 그것들을 질서정연하게, 쓰기 편하게 정리하는 방법을 깨우친 것 입니다.
모든 것들을 질서정연하게 하고자 하는 강박증을 최고의 정리 전문가가 되는 것으로 승화시킨 점이 정말로 놀랍습니다.
그리고 강박증 환자답게 책에도 정말로 '거의 모든' 것의 정리법이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속옷은 몇 벌을 가지고 있고, 어떻게 빨래해서 어떻게 정리해야 하는지까지 다 적혀있습니다. 저자가 남자임에도 불구하고, 브래지어는 몇 개를 얼마의 주기로 빨래하여 어떻게 말려서 어떻게 보관하는지도 적혀있습니다.
아무래도 저자도 덕후인지, 소장하는 게임 타이틀이나, dvd, cd 등의 정리법, 바베큐 그릴 정리법, 공구 정리법 등을 아주 상세히 적어줍니다. 못, 볼트, 너트 정리법도 알려줍니다. 보통의 정리책은 정리를 하는 마음가짐을 다뤄서 뜬 구름을 잡는 느낌이었다면, 이 책은 정말로 상세하게 정리하는 방법을 알려주어 도움이 많이 됩니다.
다만 이 책은 번역이 거지같습니다. 급하게 번역을 하고, 퇴고 한 번도 안 했고, 편집자 역시 퇴고 한 번을 안 한 것 같습니다. 기본적인 '은, 는, 이, 가' 조사가 자꾸 틀려서 읽다가 문장을 다시 읽어야 할 때가 잦습니다. 마침표가 없기도 하고, 쉼표는 더 자주 빼먹었고...
원작은 꽤나 위트있게 적혀진 것 같으나 한국어는 발암 번역 입니다. 이렇게 번역이 엉망인 책은 읽다 성질이 나서 그만 읽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 장을 꼼꼼히 읽어볼 만큼 책 자체는 아주 유용했습니다.
동서양의 비움 & 정리의 개념 차이
책들을 쭈욱 읽다보니, 정리에 관한 생각도 동서양의 문화 차이가 느껴졌습니다. 미국인과 유럽인 저자들은 버리라는 것이 아니라, '가장 좋아하는 것을 선택하라' 라는 방향입니다.
예를 들어, 아이들의 인형이나 아이들이 만들어 온 미술 작품 같은 것들을 한 달 간 진열한 뒤에 아이에게 "가장 마음에 드는 인형(또는 작품)을 골라볼까?" 라고 묻는 것 입니다. 오히려 아이들은 어른들보다 과감하게 제일 마음에 드는 인형 한 개만 끌어안고, 나머지는 내 놓는다고 하네요. 가장 좋아하는 것에 듬뿍 사랑을 주고, 나머지 아이들(인형들)은 동생이나 다른 친구가 사랑하게 해주자며 벼룩시장에 내 놓거나 남에게 준다고 합니다.
이런 식으로 물건을 버린다기 보다 가장 좋아하는 것을 선택하는 방향입니다.
반면, 동양인 저자들은 '비운다'는 개념입니다.
비워서 공간을 만든다, 풍수지리를 신봉하는 저자들의 경우, 물건들이 쌓여있으면 기운을 나쁘게 한다고 믿습니다. 좋은 기운이 들어오고 모든 일이 잘 되어야 하는데, 곳곳에 쌓여있는 쓰지도 않는 물건들이 나쁜 기운을 내뿜으며 좋은 기운을 막는다고 보는 겁니다. 이건 우리나라 전래동화에서도 거울에 도깨비가 산다거나, 남이 쓰던 물건에 귀신이 붙어있다거나 하는 등의 미신과도 일맥상통하는 것 같습니다.
아무튼 비워서 여유가 있어야 새로운 좋은 것이 들어올 수 있지, 손가락 하나 들어갈 틈이 없이 빽뺵하면 새로운 좋은 것들이 올 수 없다는 것 입니다. 버려야 또 좋은 것이 생긴다는 믿음 아닌 믿음 같은 것이 있습니다.
우리 조상들도 방에 최소한의 옷가지와 책만 두고 정갈하게 살았기 때문에, 우리네의 정서에는 물건이 사방을 둘러싼 서양식 현재의 환경보다 여유로워 보이던 과거의 환경을 그리워하는 정서가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