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숲으로 옮긴 디뮤지엄의 "어쨌든 사랑 Romantic Days" 전시를 보았다. 디타워에 위치해 있어 주차가 편하다. 같은 층에 맛집과 카페가 있는 점도 부가적 매력요인이었다.
디뮤지엄으로 가는 길, 건물 사이 중정에서 위를 올려다보니, 이 자체도 작품 같다.
어쨌든 사랑, 나에게 전부 너였던 순간.
살랑이는 날씨처럼 전시회 제목부터 설렌다.
입구에 들어서니, 전시의 일곱가지 테마가 적힌 쪽지와 오늘의 연애운세를 뽑아주셨다.
오늘의 연애운: "로맨스 영화 속 주인공 같은 순간을 기대해도 좋은 하루 입니다. 적극적으로 대화하고 우연한 만남을 즐겨보세요."
가뜩이나 설레는 전시회에서 연애운이 더 설레게 만든다. 이런 달달한 전시에서 누군가를 만나면 절로 사랑이 시작되지 않을까 하는 상상의 나래를 펼쳐본다.
요즘들어 다시 전시회를 찾아다니면서, 옛 생각을 하곤 한다. 갤러리와 미술관에 사람이 그리 많지 않던 때에는 종종 우연한 만남이 있었다. 혼자 전시를 보고 있으면 말 거는 분들이 많았다. 교수님 혹은 화가이신 것 같은 어른께서 말 걸어주셔서 잠깐 동안 작품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헤어지기도 하고, 때로는 큐레이터 혹은 전시의 작가님이 말을 걸어주시기도 했다.
지금은 전시회를 즐기는 사람들이 많아져 좋은 전시가 아주 많다. 조금 거창하게 미술계의 발전을 들먹여 보자면 참 좋은 일이지만, 고즈넉한 전시장에서 우연히 같은 시간에 같은 장소에서 전시를 즐기는 사람과의 우연한 만남을 기대하기는 어려운 환경이 되었다. 뒤 따라오는 사람들에 밀려 빠르게 다음 작품으로 이동하거나 한발짝 뒤로 물러나 인파에 가려진 작품을 보게 된다. 너무 사람이 많아 오히려 우연한 만남이 어려울 것 같은 느낌이랄까.
어쨌든, 연애운세를 보며 혹시 모를 전시장에서의 우연한 만남을 꿈꿔보면서 발을 옮기기 시작했다. 전시는 사랑의 달콤한 순간들을 일곱 단계로 나누고 있었다. 첫째 사랑인지도 모르고 수줍었던 그때, 둘째 언젠가는 바라봐 주기를 간절히 바라던 그 밤, 셋째 미칠 것 같이 뜨겁게 열병을 앓던 그 해, 넷째 애타게 다시 만난 그 날, 다섯째 잡힐 듯 잡히지 않는 꿈결같던 그 시간, 여섯째 소중한 추억으로 반짝반짝 빛나던 그 시절, 일곱째 있는 그대로의 나를 사랑하는 지금 이순간이다.
사랑인지도 모르고 서툴고 수줍었던 그 때
아, 전시장에 들어서자 마자 천계영 작가님의 작품이 맞아준다. 정말 좋아했었는데...
전시 소개를 보며 천계영, 원수연, 신일숙, 이미나 작가님의 성함을 보면서는 조금 갸우뚱했다. 정말 좋아하던, 그리고 좋아하는 작가님 들이나 이 분들의 작품과 다른 작가들의 작품이 미술관이라는 공간에서 어떻게 어우러질 수 있을까? 일러스트가 전시될 지 어떻게 조화롭게 구성될 지 궁금했는데 순정만화로 심장을 쥐었다 놨다 하시던 그 작품들은 설치 미술로 한 공간을 차지하며 살랑이고 있었다.
시절을 풍미하셨던 만화가님들의 작품 외의 다른 작품들의 배치도 흥미로웠다. 저 밑으로 기어가 옆으로 넘어가고 싶은 충동을 꾹 눌러 참았다. 흔한 칸막이가 아닌, 공간의 구성도 흥미롭다. 때로는 이처럼 막힌 듯 열려있는 공간이고, 어떤 곳은 무대처럼 커튼을 열고 들어가고, 감겨있는 공간을 들어가기도 한다.
언젠가 바라봐 주기를 간절히 바랐던 그 밤
이은혜 작가님의 블루. 음악, 살랑이는 화면. 배경의 디지털 아트, 너무 좋았다. 이 순간 나 말고 여기 혼자 서 있는 누군가가 있다면 정말 반했을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없었지...)
미칠 것 같이 뜨거운 열병을 앓던 그 해
사진 작품도 좋고, 작품의 구성과 전시도 계속 감탄하며 보게 된다. 흔히 보던 안정적 눈높이에 일렬로 걸려 있는 작품이 아니라, 목을 꺽어 위를 보아야 하는 작품도 있고, 셀카존으로도 손색없을 듯한 거울 공간 속에서 마주하는 작품은 다른 느낌이었다.
거대한 스크린으로 보는 장면도 색달랐고, 크리스탈 같은 공간도 좋았다. 테마마다 다른 느낌의 공간들이 재미가 있다. 혼자서도 재미나게 구석구석을 보았는데 데이트 코스로 와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계단의 숨은 그림
어느 한 구석 신경쓰지 않은 곳이 없다. 계단을 오를 때면, 발 모양 스티커가 붙어 있는데 처음에는 뭣 모르고 "내 사랑을 찾아줘"라는 말에 사랑을 찾아 떠나는 여정을 의미하는 줄 알았다.
그러나 다른 관객분들이 "어머나, 저것봐. 하트로 보여." "그렇네. 여기서서 사진 찍으면 그렇게 보이네." 라고 하며 인증샷을 찍는 것을 뒤늦게 듣고 다시 스티커로 가서 위를 올려다 보았다.
규칙성 없이 배열되어 있는 것 같았던 전등이 하트로 보인다. 굳이 의미를 부여하자면, 스치는 인연 중 어떤 특정 각도에서 시선을 마주하면 사랑이 되는 그런 느낌이랄까.
애타게 기다려 다시 만난 그날
복도를 걸으며 한 작품씩 보게되는 구성도 흥미롭다. 창밖의 풍경이 좋아 산만해지기도 하지만, 좀 더 풍경 속에서 행복해 보이는 연인을 보는 기분도 들었다.
소화기까지 이렇게 예쁠 일인가. 소화기조차 하나의 설치 미술 작품 같다.
잡힐 듯 잡히지 않던 꿈결같던 그 시간
유럽 어딘가에 시간여행을 온 듯한 느낌이었다.
작품의 방 속에 서 있는 기분.
소중한 추억으로 반짝반작 빛나던 그 때
어느덧 사랑의 이야기는 '소중한 추억으로 반짝반짝 빛나던 그 시절'로 접어들었다.
작품도 좋고, 가끔 나오는 좋은 글도 참 좋다.
멋지다 - . 뭔가를 좋아할 때 원없이 좋아해보는 것.
그렇다, 뭔가를 원없이 좋아해보아야 계속해서 사랑을 하든 헤어지든 후회가 없을 터.
반짝이는 것이 있다면 잘 간직해야지. 다듬지 않아도 그건 내게 보석이니까.
그 보석이 무엇일까, 떠올려본다. 유난히 이 전시는 낭만에 젖게 만드는 촉촉한 무언가가 있었다.
있는 그대로의 나를 사랑하는 지금 이순간
어느덧 전시의 마지막 장이 되었다.
네가 나를 떠나도 나는 나를 떠나지 않아.
아... 마지막 장은 사랑의 끝에 대한 이야기인가 보다. 그렇다. 헤어지고 나도 나는 그대로 남는다.
예상치 못한 순간에 마주치는 애정했던 만화가의 작품은 색다른 감동이었다. 살랑이는 움직이는 영상으로 보니, 더 멋있다. 만화책으로 볼 때도 참 좋았는데...
전시의 끝. 계단.
참 이 전시는 구석구석 좋다. 전시를 다 본 뒤 돌아 나오는 길에도 사랑에 대한 명언이 맞아준다.
결혼, 관계에 대한 좋은 글 중 내가 좋아하는 칼릴 지브란의 글이다.
"서로 함께 있되, 사이에 거리를 두세요. 창공의 바람이 당신들 사이에서 춤출 수 있도록"
연인이든 부부든 바람이 살랑이며 지날 수 있는 거리는 중요하다.
다른 사랑에 대한 예의를 잊어버리는 것이야 말로 사랑에 빠졌다는 확실한 증거 아닐까요? - 제인오스틴
사랑에 빠지면, 예의 뿐 아니라 내 삶을 잊기도 한다.
기념품 샵
디뮤지엄 기념품 샵은 볼거리가 많았다.
원수연 작가님의 풀하우스 전집, 신일숙 작가님의 아르미안이 네딸들 전집이 있다. 전시와 관련된 기념품이 많고, 전시 외의 독특한 아이템이 많아 보는 재미가 있었다. 구경하다가 마그넷처럼 생긴 종이 방향제를 하나 구입했다.
마지막으로 화장실을 들렀는데, 화장실까지 예쁘다.
디뮤지엄 전시회는 더욱 더 챙겨서 오게 될 것 같다. 구석 구석 너무 예뻐서.
디뮤지엄 예매 https://www.daelimmuseum.org/
코로나 이후로 전시회를 보려면 예매를 해야 하니, 초큼 귀찮기도 하고, 예매 성공 못할 때면 울적하기도 하다. 콘서트 예매하듯 몇 번을 들어가 실패한 전시도 있고... 그래도 예매를 하는 시스템이 생긴 덕분에 일정 시간의 관람객 수가 지나치게 몰리진 않으니 좋은 점도 있다. (그래도 갑자기 시간 날때 미술관에 들르는 그 낭만도 좋았는데...)